투수로서 가장 존경했던 투수. (한용덕도 포함)
빙그레 이글스가 내 인생의 전부일 때 부터 가장 존경하고 투구폼을 따라했던 투수.
해태와의 경기에서 퍼펙트 경기를 세울 뻔 했다 좌절됐을 땐.. 날 울렸던 선수.
그대가 있어 제가 야구를 좋아했습니다.
내게도 전설인 21.. 송진우!
한화 이글스 소속의 야구 선수. 등번호는 21번.
한화 이글스뿐만 아니라 한국 야구의 살아있는 전설.
생년월일 1965년 2월 16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충청북도 증평군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8년 드래프트1위
소속팀 빙그레 이글스, 한화 이글스 (1989~2009)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충청북도 증평군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8년 드래프트1위
소속팀 빙그레 이글스, 한화 이글스 (1989~2009)
그에게 있어서 야구는 그의 인생의 전부다.
고교시절부터 뛰어난 좌완투수로 주목받았고 2학년때 황금사자기에서 학교의 첫우승을 일궈냈다.
그러나 3학년때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한 출전을 강행하여 준우승이라는 결과를 낳았지만,
대학3학년때까지 선수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다. 다들 더 이상은 송진우에 대해 기대하지 않았으나
끊임없는 노력으로 대학 4학년 때 재기에 성공. 올림픽에 출전시키기 위한 협회의 강제적인 유보로
인해 프로행이 1년 늦춰진 송진우는 89년 빙그레에 입단한다. 그리고 입단 첫 해부터 송진우는 자신의
기량을 증명한다. 첫 데뷔전을 완봉으로 장식하며 그 해 기록 방어율 2.81에 9승10패9세이브, 그리고
그 다음 해 사람들의 "2년차 징크스"를 보란듯이 뒤엎으면서 방어율 1.82에 11승7패 27세이브를 기록했다.
데뷔 4년동안 50승을 거둬 매년 평균10승 이상을 올리면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3학년때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한 출전을 강행하여 준우승이라는 결과를 낳았지만,
대학3학년때까지 선수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다. 다들 더 이상은 송진우에 대해 기대하지 않았으나
끊임없는 노력으로 대학 4학년 때 재기에 성공. 올림픽에 출전시키기 위한 협회의 강제적인 유보로
인해 프로행이 1년 늦춰진 송진우는 89년 빙그레에 입단한다. 그리고 입단 첫 해부터 송진우는 자신의
기량을 증명한다. 첫 데뷔전을 완봉으로 장식하며 그 해 기록 방어율 2.81에 9승10패9세이브, 그리고
그 다음 해 사람들의 "2년차 징크스"를 보란듯이 뒤엎으면서 방어율 1.82에 11승7패 27세이브를 기록했다.
데뷔 4년동안 50승을 거둬 매년 평균10승 이상을 올리면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1992년에는 선발-마무리 할것없이 경기에 나가. 구원왕과 다승왕을 동시에 차지했으나, 당시 김영덕
감독이 이를 위해 지나친 밀어주기를 해서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세간의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후
송진우는 내리막길을 걸었고 방어율이 4.79으로 치솟은 1998년에는 언론에선 은퇴를 거론하기도 했으나
흔들리지 않고 독학으로 메이져리그를 보면서 체인지업을 배우는 한편 자신의 변한 구위를 인정하고
기교파 스타일로 변화시켜 1999년엔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하면서 15승5패6세이브를 기록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2002시즌 개막전을 완봉으로 장식하며 시작. 시즌3승을 올린경기에서 당시 선동열이
가지고 있던 최다승기록 146승을 뛰어넘었고 5월19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150승을 기록했다. 2004시즌
기아와의 경기에서 만 37세 7개월로 최고령 완투승기록을 세웠고 2005시즌에는 만 39세6개월로 최고령
완봉기록을, 그리고 대망의 2006 시즌 8월 29일 개인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같은 해 9월 24일에는 최고령
선발승(40세 7개월 8일) 기록도 세웠다.(최고령 선발승은 현재 2008년 9월 13일까지 갱신되었다.)
감독이 이를 위해 지나친 밀어주기를 해서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세간의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후
송진우는 내리막길을 걸었고 방어율이 4.79으로 치솟은 1998년에는 언론에선 은퇴를 거론하기도 했으나
흔들리지 않고 독학으로 메이져리그를 보면서 체인지업을 배우는 한편 자신의 변한 구위를 인정하고
기교파 스타일로 변화시켜 1999년엔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하면서 15승5패6세이브를 기록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2002시즌 개막전을 완봉으로 장식하며 시작. 시즌3승을 올린경기에서 당시 선동열이
가지고 있던 최다승기록 146승을 뛰어넘었고 5월19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150승을 기록했다. 2004시즌
기아와의 경기에서 만 37세 7개월로 최고령 완투승기록을 세웠고 2005시즌에는 만 39세6개월로 최고령
완봉기록을, 그리고 대망의 2006 시즌 8월 29일 개인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같은 해 9월 24일에는 최고령
선발승(40세 7개월 8일) 기록도 세웠다.(최고령 선발승은 현재 2008년 9월 13일까지 갱신되었다.)
그러나 2006년 한국시리즈 기간 중에 부상으로 시즌아웃된 이후 또 한 차례 부진을 겪게 되어 2007 시즌에는
주로 중간 계투요원으로 나와 2구원승을 거두는 데 그쳤고, 2008년에는 선발로 복귀하여 팀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등 승운이 따르지 않아 6승에 그쳤으나 팀 내에서 류현진 다음으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등 꾸준히
활약했다. 2009년에는 중간계투로 다시 전환하여 4월 8일 두산 베어스 전에서 구원승을 올려 최고령 승리투수
기록을 다시 갱신했다.
주로 중간 계투요원으로 나와 2구원승을 거두는 데 그쳤고, 2008년에는 선발로 복귀하여 팀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등 승운이 따르지 않아 6승에 그쳤으나 팀 내에서 류현진 다음으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등 꾸준히
활약했다. 2009년에는 중간계투로 다시 전환하여 4월 8일 두산 베어스 전에서 구원승을 올려 최고령 승리투수
기록을 다시 갱신했다.
2008년 6월 6일 대전구장에서 우리 히어로즈(현 히어로즈)를 상대로 선발 등판하여 8회 마지막 아웃을
남겨놓고 송지만 선수와 대치(송회장vs송집사). 이 대결을 삼진으로 장식하며 대망의 2000 탈삼진을 달성했다.
현재는 3000 이닝 등판이라는 또 다른 대기록 작성을 코 앞에 두고 있는 상황.
결국 4월 9일 두산전에서 이대수를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내며 달성하였다.
남겨놓고 송지만 선수와 대치(송회장vs송집사). 이 대결을 삼진으로 장식하며 대망의 2000 탈삼진을 달성했다.
현재는 3000 이닝 등판이라는 또 다른 대기록 작성을 코 앞에 두고 있는 상황.
결국 4월 9일 두산전에서 이대수를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내며 달성하였다.
비단 이런 성적으로뿐만 아니라, 선수권익보호를 위한 선수협 창설의 주역 중 한명으로 참여하여 현재의
선수협을 만들어 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현재 송진우 선수에 대한 존경심은 비단 성적뿐 아닌 이런
사실에서도 기인한다.
선수협을 만들어 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현재 송진우 선수에 대한 존경심은 비단 성적뿐 아닌 이런
사실에서도 기인한다.
별명은 송골매, 송회장님(초대 선수협 회장을 역임), 송덕스(송진우 + 메이저 리그 노장 투수 그레그
매덕스의 합성).
매덕스의 합성).
깨끗하고 점잖은 이미지의 소유자이지만 2006년 한화vs현대전에서 안영명이 빈볼성 투구로 김동수 선수에게
싸대기를 맞아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나자 불같이 뛰쳐나와 이단옆차기를 작렬해 벌금 100만원의 징계를 받은
적이 있다. 이는 원래 난투극이 벌어져도 신발에 박힌 스파이크 때문에 선수가 다칠 확률이 높아져서 발차기는
금기시하고 있기 때문(박찬호 또한 발차기 때문에 중징계와 역대 MLB 난투극 Best10에 올랐다). 덕분에
송진우는 이때 사건 딱 하나로 역대 프로야구 난투극 Best장면때마다 항상 등장한다(...)
싸대기를 맞아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나자 불같이 뛰쳐나와 이단옆차기를 작렬해 벌금 100만원의 징계를 받은
적이 있다. 이는 원래 난투극이 벌어져도 신발에 박힌 스파이크 때문에 선수가 다칠 확률이 높아져서 발차기는
금기시하고 있기 때문(박찬호 또한 발차기 때문에 중징계와 역대 MLB 난투극 Best10에 올랐다). 덕분에
송진우는 이때 사건 딱 하나로 역대 프로야구 난투극 Best장면때마다 항상 등장한다(...)
'개마고원'이라는 한식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식집 이름은 온게임넷 스타리그 공식맵인 개마고원에서
따왔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러나 현재는 없어졌다. 아무래도 고기집 경영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인듯
하다. 가 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가격이 상당히 비쌌다고한다.
따왔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러나 현재는 없어졌다. 아무래도 고기집 경영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인듯
하다. 가 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가격이 상당히 비쌌다고한다.
은퇴했을때에는 성대한 은퇴식은 기본이요, 영구결번도 고려해야 할 듯. 만일 정말로 영구결번이 된다면,
21번은 OB 베어스의 박철순에 이어, 최초로 2개 구단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등번호가 된다. 현재 영구
결번에 대한 논의가 진행중이며, 특별한 사유가 없지 않는 한 영구결번이 될듯 보인다.
21번은 OB 베어스의 박철순에 이어, 최초로 2개 구단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등번호가 된다. 현재 영구
결번에 대한 논의가 진행중이며, 특별한 사유가 없지 않는 한 영구결번이 될듯 보인다.
200승, 2000안타를 기록해야 가입할 수 있는 한국판 명예의 전당인 성구회의 1호 회원. 양준혁, 전준호와
함께 창립 멤버다.
함께 창립 멤버다.
2009년 8월 16일, 본인의 명성에 걸 맞는 피칭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판단, 팀 리빌딩에 맞춰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가족 그리고, 구단과의 상의를 통해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경기는 2009년 9월 23일 LG 홈경기전에서 은퇴경기겸 은퇴식을 가졌다. 또한 그의 등번호 21번도
영구결번을 시켰다. 21번이 영구결번 한것은 박철순 이래 두번째. 단 한타자(박용근)만을 3구로 상대해
안타를 맞고 그의 마지막 투구는 끝나게 되었다. 앞으로 코치로 활동하게 될 그를 기대해보자.
기회를 주고자 가족 그리고, 구단과의 상의를 통해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경기는 2009년 9월 23일 LG 홈경기전에서 은퇴경기겸 은퇴식을 가졌다. 또한 그의 등번호 21번도
영구결번을 시켰다. 21번이 영구결번 한것은 박철순 이래 두번째. 단 한타자(박용근)만을 3구로 상대해
안타를 맞고 그의 마지막 투구는 끝나게 되었다. 앞으로 코치로 활동하게 될 그를 기대해보자.
잘 가십시오, 송 회장님. 그 동안 열심히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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